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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 않아서 더 편했다

by 옥힁 2025. 4. 22.

 

유럽에서의 거점으로 흔히 리스본을 떠올리지만, 나는 그 주변의 조용하고 소박한 마을에서 한 달을 보내보기로 했다.
이 글은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편안했던 그곳에서의 체류 기록이다.
하루하루가 특별하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은, 작고 느린 일상에 대한 이야기다.

 

 

왜 ‘리스본 외곽’이었을까?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이들이 그 감각적인 풍경과 감성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활기마저 조금 벅차게 느껴졌다.
사람은 많고, 물가는 생각보다 비쌌으며, 빠르게 움직이는 여행자들과 복잡한 골목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났다.
바다 쪽으로 갈수록 풍경은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에스토릴.
해변과 언덕, 석조 건물이 어우러진 이 마을은, 여름이면 붐비지만 11월엔 조용했다.

문을 닫은 기념품 가게, 텅 빈 산책로, 바람이 먼저 말을 거는 거리.
누군가의 여름이 접힌 자리 같았고, 그 풍경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어줬다.
말이 줄어든 공간에서야 비로소 내 속마음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고요한 흐름 속에서, 나는 조금씩 이곳의 하루에 스며들었다.
익숙해진 골목, 아침마다 걷는 길, 그리고 늘 찾던 카페.
“Bom dia!” 하고 인사하면 주인은 따뜻하게 웃으며 커피와 파스텔 드 나타를 건넸다.
이곳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았고, 말할 때도 충분한 여백이 있었다.

그 느긋함 덕분에 나도 자연스레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느림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줬다.
도시의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 숨 고르기가 필요했던 시기였으니까.

 

 

외곽에서의 루틴: 일보다 하루가 먼저였다

그곳에서의 하루는 ‘일 먼저’가 아니라 ‘삶 먼저’였다.
아침엔 작은 언덕길을 걸으며 바다를 내려다보고, 마트에서 사온 재료로 점심을 만들어 먹고, 오후엔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이 마을에는 코워킹 스페이스는 없었지만, 동네 도서관과 와이파이가 괜찮은 카페 몇 곳이 나의 작업실이 되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글을 쓰다 보니, 카페 주인도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늘도 글 쓰는 거야?” 라며 웃고 지나가는 그 한마디가, 낯선 곳을 익숙하게 만들어줬다.

 

또 하나 좋았던 건, 정보가 너무 많지 않았다는 점.

리스본 시내에선 관광 명소가 많고, 사람들 추천이 넘쳐났지만, 여기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별다른 계획 없이도 풍경은 늘 좋았고, 걷는 길마다 다르게 느껴졌다.

자극이 적다 보니 오히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게 이 마을의 진짜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느림이 가르쳐준 것: 지금 여기에 머무는 법

외곽 마을에서의 한 달은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아주 중요한 걸 가르쳐줬다.


“지금 여기”에 머무는 법.

늘 뭔가를 계획하고, 다음 장소를 생각하고, 콘텐츠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그냥 오늘 하루에 만족하고, 햇살이 드는 창문 앞에 앉아 있는 것.

그걸로도 충분한 날들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배운 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이었다.


조용한 골목을 걸으며 듣던 음악, 바닷가에 앉아 바람을 맞던 시간, 글 한 줄이 잘 안 써져서 그대로 노트북을 덮고 산책을 나갔던 오후.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일상이자 쉼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조금 더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졌고, 조금 더 단순해졌다.

지금도 그 마을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머물렀던 시간이 그렇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화려하지 않아서 더 편했다
화려하지 않아서 더 편했다

 

 

🧩 리스본 외곽의 삶이 어울리는 사람들
이 글을 쓰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아마도 ‘비워진 공간’을 오랜만에 만나서였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매일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잠시 쉬고 싶다면

사람 많은 도시보다 조용한 마을이 더 끌린다면

영감이 아니라, 여유를 찾고 있다면

그 외곽의 작은 마을이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여정은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아마 또 어딘가의 ‘느린 동네’일지도 모르겠다.